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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결과를 보며 문득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떠올랐다. 자전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생각난다. 가장 개인적이기에 가장 창의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이 영화는 당연하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진실을 일깨운다. 내 삶이 누군가의 배경이 아니고, 내가 서 있는 이 순간도 역사의 일부이며, 사회의 모든 요소는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당연한 사실. 입주 가정부 클레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로마>는 얼핏 지극히 사적인 드라마처럼 보인다. 무책임한 남자를 만나 계획에 없었던 임신을 하고, 설상가상 고용주 남편의 외도로 직장마저 잃을 상황에 놓인 원주민 여성의 이야기.
하지만 개인의 어떤 서사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숙고하는 카메라는 현미경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망원경으로 확장되는 법이다. 입주 가정부 클레오의 굴곡진 삶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멕시코 원주민의 역사와 애환이 녹아 있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로마>
[송경원 편집장] 잘 버티는 중. 앞으로도 잘 버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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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강정>을 봤다. 의문의 기계에 들어간 여자주인공이 닭강정으로 변한다는, 상상조차 못해본 설정을 밀고 나가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끝까지 다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항마력이 필요한 B급… 도 아닌 D급 코미디라고 하기에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몇몇 지인들의 호평에 솔깃해졌다. 강력한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읽어낸 이도 있고 장안의 화제인 <삼체>보다 더 재미있게 봤다는 이도 있었다. 질문도 떠올랐다. 왜 감자튀김도 아니고 탕후루도 아닌, 닭강정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이나 물건의 겉모습에 관심이 많은 내가 재밌게 볼만한 콘텐츠겠다 싶은 기대가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만족. 첫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보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다. 기대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외모가 중요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신선한 방식으로 다루어진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최민아(김유정)가 변신한 닭강정이 같은 식당에서 만든 다른 닭강정과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왜 하필 닭강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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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끝나고 2주가 지나도록 내가 살던 이 집이 낯선 것은 다 냉장고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3개월간 방치한, 한달가량 열어본 적도 없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기란 외장하드 속 촬영 소스를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냉장고 안에 내가 뭘 넣어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서운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 수가 없었고 생수병이며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며 식탁과 싱크대에 쌓여만 갔다. 더이상은 이 시한폭탄 같은 냉장고를 끌어안고 살 수는 없었다. 날을 잡고 냉장고 청소를 했다. 5리터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몇번이나 내다버리고 재활용 쓰레기봉투는 큰 봉지로 두개나 나왔다. 하루 종일 냉장고 속을 닦고 또 닦았다. 하얗게 빛나며 찬기를 내뿜는 텅 빈 냉장고 속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이것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막막했다. 내가 뭘 먹고 살았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일단은 바나나 한 송이와 요구르트 한 묶음을 사다 넣어놨는데 그 사이 또 그대로 검게 시들고 유통기한이 지나버
[김세인의 데구루루] 쓰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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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영화 같다. 낭만적으로 들릴 법한 이 말이 요즘은 피로로 다가온다. 요즘 장르가 대체로 디스토피아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두 대상을 이어 붙이고 싶을 때 비유법으로 다리를 놓는다. 다리를 잇는 요령은 대상에서 유사한 속성 한 가지를 추출하는 데 있다. 예컨대 ‘눈은 마음의 창’이란 표현엔 ‘본다’는 속성을 매개로 눈동자와 창문, 물리적으로 동떨어진 두 세계를 잇는다.
‘영화 같다’는 표현의 다리로 잇고자 하는 건 결국 현실이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흔히 ‘영화 같다’고 경탄한다. 여기서 현실과 영화를 잇는 매개는 대중의 욕망이다. 집단의식, 시대정신,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때로 사람들은 영화를 경유하여 각자의 현실을 마주한다. 재밌는 건 이 반응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두 갈래로 갈라진다는 거다. 하나는 소망을 담은 길. 실현되기 힘들지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상적인 상황을 꿈꾼다. 다른 하나는 두려
[송경원 편집장] ‘영화 같은’ 현실을 만드는 가장 쉽고 빠른 길(feat. 투표하고 영화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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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좀 닫아줄래? 우리 학교는 4년에 한번, 4월9일 이후 첫 번째 수요일, 전교생이 게임을 하나 해. 투표용지야, 받아둬. 강제성은 없어. 설명, 이어갈게. 어느 반으로 갈지 선택하면 그에 따라 각자 등급이 정해져. 첫째, 우리 반이 아니면 F등급이야. 우리 반 말고도 여러 반이 있고 수업을 쨀 수도 있는 건데 이게 모두 같냐고? 응, 뭐든 우리에겐 1도 도움이 안돼. ‘다양성 존중’ 이러면서 놔두면 멀텅하게 지는 거야. “(이종섭 주호주대사 논란은) 공수처와 야당, 일부 언론이 결탁한 정치 공작.” “집에서 쉬는 것도 (기호) 2번을 찍는 것과 같다.” 높은 분들 입에서 이런 엮어치기, 갈라치기가 왜 나오겠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야.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않으면 학교생활 못해.
순순히 우리 반에 들어온 친구들은 일단 C등급. 실망한 눈치네. 평소 뭘 얼마나 했어? 투표 한번으로 상위 등급이 될 거라 기대했어? 맨입으론 못 주겠다, 몸값 올리고 싶다? 그럼 잠깐 ‘부동층’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피라미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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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행동을 ‘MBTI’로 분석하는 흐름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어떤 갈등은 MBTI가 없었다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 ‘P’(인식형)와 ‘J’(판단형) 유형으로 나뉜다는 걸 몰랐을 때를 생각해보라. 여행이란, ‘분 단위로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계획한 놈’과 ‘그저 시간 속에 나를 흘려놓는 놈’이 서로 ‘저새끼는 뭐가 문젤까?’를 끝없이 질문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J 부심을 가진 친구가 ‘계획 수립’이라는 자신의 숙명을 기꺼이 짊어지면, P는 귀여운 척을 하면서 빡빡한 계획에 숨구멍을 뚫는 역할을 이행하면 그만이다. 행여나 갈등이 생기더라도 “쟨 P라서 그래”, “쟨 J라서 그래”라는 말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으니 MBTI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면서 도리어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신통한 규격인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MBTI 테스트로는 알아낼 수 없는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면을 좋아한다. 한 인간이 삶의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사랑이 사랑만으로 완벽하길, (BT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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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생일 챙기는 게 머쓱해 종종 까먹곤 한다, 는 게 자발적 망각에 대한 현재 나의 공식 입장이다. 모래 더미에서 기어이 바늘을 찾겠다는 각오로 긍정 회로를 돌린 결과, 나이 먹어 편해진 것 중 하나는 주변에 이렇게 말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솔직해지자면 어릴 적부터 생일이란 피곤한 기념일로부터 도망쳐왔다. 이유야 복합적이지만 제일 큰 건 내가 소심한 외톨이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INFP라는 편리한 간판으로 한방에 설명 가능한데, 나는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렇게 안락한 자기 합리화 속에서 세계는 점점 좁아져갔다. 지금 와서 꼭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생일 파티 사진 한장 없는 앨범을 볼 땐 조금 쓸쓸한 게 사실이다.
요즘은 무리가 되어도 기념일을 꼭 챙긴다. 없는 기념일도 핑계처럼 만들어 주변에 선물을 한다. 그때 못 챙긴 한이 맺혀서 그런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기념
[송경원 편집장] 그래봤자 잡지 한권 그래서 더 소중한 잡지 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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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맹세코 부끄럽지 않다. 그걸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시에 대해 잘 알고, 어쩌면 쓰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다. 아니면 내가 약간은 문학적 허영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비밀인 것처럼 시를 좋아해왔다. 꽤 오랫동안.
청소년일 때부터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 적는 공책이 따로 있었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너무 부끄러워서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적었다. 한용운의 <복종>이나 조지훈의 <낙화>, 김수영의 <풀> 같은 시. 용돈이 생기면 이름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샀다. 아는 시인이 많아져서 언젠가부터 공책을 접었다. 대신에 외우기 시작했다. 한 연이라도, 한 행이라도.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정철의 <사미인곡>을 너무 좋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러니까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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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대개 인터뷰하는 대상과 관련이 있는 곳에서 진행한다.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나 인터뷰이가 추억하는 요리가 있는 장소, 자주 찾는 공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인터뷰이 선정만큼 중요한 건 어디서 인터뷰를 할지다. 그에 대해 어디서 만나야 할지를 혼자 생각하고 몇 군데를 골라서 그와 내가 대화하는 상상을 하는 일은 인터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루틴이다. 이번 인터뷰이가 영화감독 A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린 건 제주도였다. 그는 몇번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에 오면 제주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인터뷰를 하러 제주까지 갈 수도 없는 일이고…. A의 영화가 잘 어울리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를 생각하면 독일 맥주가 유명한 맥줏집이나 영화에도 등장한 중식당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도 정하지 않고 고민만 길어지고 있으니 선배는 횟집이 어떠냐고 했다. 고급 일식당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섹션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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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최애의 아이>가 <씨네21> 표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다. 극장판이 개봉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이슈도 없었지만 우연히 기회가 맞아떨어져, 사고 한번 쳐볼까 상상한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전임 편집장이 휴가 간 사이 대리로 잠깐 데스크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예정됐던 표지가 펑크나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예전부터 즐겨보던 <최애의 아이>가 떠올랐다. 마침 <최애의 아이>가 세간의 화제라고 하니 잡지 판매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게 공식적인 명분이었지만 실은 그냥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곳에서 크게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그뿐이다.
‘그냥’은 힘이 세다. 영화 <황산벌>의 키워드 ‘거시기’와 비슷한 포지션이랄까. 비어 있는 그릇 같은 단어 안에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마음이 담긴다. 대체로 낯간지럽거나 부끄러울 때 남용하는 이 게으른 말에서 문득 상대를 향한 믿음과 배려를 느낀다. 스스로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
[송경원 편집장] 좋아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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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판에서 때아닌 이념 전쟁이 한창이다. 진작부터 “좌파에 장악된” 영화계를 교정하기 위해 싸움을 걸어온 이들이 있고 영화 이름에서부터 ‘전쟁’을 집어넣었다. 대통령 등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거들기도 한다. 잘 몰랐던,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그 영화를 통해 배웠다는데, 영화가 다루었다는 사실이 역사학계가 이미 집적해놓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거나 이미 특정 집단 사이에 돌고 돌던 ‘의견’에 불과한 터라 헛웃음이 난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헌법적 책무’를 짊어진 그는 영화 이전에 알고 있었어야 할 ‘기초적인’ 역사를 대체 무엇으로 배우고 있었단 말일까?
애써 붙인 이념 다툼이 그럭저럭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인지 최근 개봉한 ‘일제 쇠말뚝’ 영화를 두고 “좌파들이 보는 영화”라고 딱지를 붙인 감독. 그러나 꽤 비싸진 영화표를 사서 굳이 시간을 들여 영화관에 갈 여유가 있는 좌파가 우리나라에 너무 많아서인지, 이 영화는 또 한번의 ‘천만 관객 흥행사’를 써나갈 기세다. 몸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집단기억의 무덤 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