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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거가 아니다, <태풍클럽>을 지금 다시 본다는 것
송경원 2024-06-25

성장은 환상이다. 오늘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간다는 건 불안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 어쩌면 엉망진창이라고 느껴지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단 한번 찾아올 완벽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고, 설사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고통들이 결국 나를 더 성장시킬 거라고 믿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일은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뭐라도 나아질 거라 믿지 않고선 닥쳐올 내일을, 미지를 감당하기 어렵다. 물론 성장 자체가 거짓은 아니다. 어느 시기까지 모두 물리적으로 자라고 커진다. 하지만 영혼이, 내면이 자라 더 나은 무언가가 된다는 말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성장과 성숙은 다르다. 어쩌면 성숙이란 머무르기를 포기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더 나은 무언가로) 자라야 한다’는 성장의 강박은 때때로 저주의 주문처럼 들린다.

이야기 속 인물의 성장이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시점 납득 가능한 유일한 진실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형태가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바뀐다. 10년, 20년, 3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존재다. 시간은 모든 걸 변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선 성장보다 변화라는 말이 더 미덥다. 역설적이지만, 영화에 매료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의 마력은 오늘을 포착하여 멈추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카메라는 시간으로부터 존재를 박리시키고, 필름은 변하지 않는 것을 스크린에 새겨넣는다. 몇십년 전 영화를 다시 꺼내 보는 건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게 아니다. 스크린에 상영되는 순간, 과거로부터 온 영화는 언제나 현재가 된다. 심지어 주변부로 시간의 무게와 상호반응한 역사까지 함께 축적되어, 성숙해진다. 필름이 무르익어간다고 해도 좋겠다.

‘성숙’이란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영화를 꼽는다면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 반드시 <태풍클럽>이 들어가리라 확신한다. ‘태풍처럼 흔들리는 청소년기의 방황을 담았다’는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이 영화의 에너지를 한줌도 길어올리지 못한다. 태풍이 들이닥친 학교, 귀가하지 않고 학교에 머물기로 한 학생들의 기이한 돌발행동들을 다룬 이 영화가 펼치는 상황은 불안, 불온, 불안정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에 고립된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이들의 절박함은 장난 취급 당한다. 이윽고 강당에 모인 아이들은 음악을 틀고 하나둘 옷을 벗어던지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논리와 이성의 바깥에서 예측 불허의 순간들로 튀는 장면들은 수평 트래킹의 롱테이크, 리드미컬한 카메라로 포착되어 끝내 영원으로 박제된다. 태풍처럼 격렬한 청춘의 형상. 울타리를 벗어나면 죽음밖에 없다는 걸 알더라도 기꺼이 몸을 던지는 통제 바깥의 매혹적인 에너지.

미성숙, 우울, 불안정 혹은 청춘. <태풍클럽>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해석당할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지금에 와서 유난히 빛나는 건, 청춘의 불안정한 찰나가 필름의 몸을 빌려 영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카메라의 권능이 찰나를 붙잡는 데 낭비되지 않길 소망한다. 영화는 찰나를 가두거나 복원하거나 구경거리로 삼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갈 수 있고, 감독 소마이 신지는 그 길을 걸어왔다. 어떤 목표와 방향으로 나아가는 도구가 아니라 순간을 감싸 안아 포착하는 행위로서의 율동. 소마이 신지는 찰나를 어떻게 찰나로 남겨둘 것인지를 고뇌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성장이라는 저주를 벗고 죽음과 뒹굴며 청춘의 불안정한 에너지를 현재형으로 분출한다.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지리멸렬한 현실을 깨부술 만큼 엉망진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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