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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눈치와 염치
송경원 2024-06-14

아이 돌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지루함에 몸을 비틀며 핸드폰을 슬쩍 보다가 아이 앞에서 핸드폰 좀 그만 보라며 혼이 난다. 그렇게 강제로 아이‘들’을 가만히 보다 보니 문득 신기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조차 아이들은 도통 지루할 틈이 없다. 권태를 허락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데려다놓아도 기꺼이 놀이를 시작하고, 질리면 바로 다른 놀이를 찾아낸다. 놀거리가 다 떨어졌을 땐 기어이 상상 속 친구와 함께 새로운 놀이를 창조해내고야 만다. 아이들의 개념 속엔 ‘지루함’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 같다.

이제는 픽사의 수장이 된 피트 닥터 감독이 <인사이드 아웃>을 제작한 계기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딸에 대한 궁금증이었다고 한다. 대체 저 작고 앙증맞은 머릿속에서 어떤 기상천외한 세상이 펼쳐지는 중일까. 어린 시절이 없었던 사람은 없지만 다 자라버린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은 정하기 나름인데, <인사이드 아웃2>를 본 뒤 어쩌면 권태가 친숙해진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룬 <인사이드 아웃2>는 ‘슬픔’ 대신 ‘불안’을 주요 테마로 가져온다. 하지만 실은 불안이 자리할 수 있는 배경에는 지루함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세상이 마냥 재미있지 않은 순간, 권태로운 시간의 틈 사이로 슬며시 불안이 깃든다.

불안은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과 달리 의외로 성실한 관찰과 근면한 사고의 결과다. 타인의 반응을 부지런히 관찰하고 경우의 수를 생각하여 도출해낸 ‘어른스러운’ 태도 중 하나라 해도 좋겠다. <인사이드 아웃2>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친척 어르신이 지나가는 칭찬으로 건넨 말이 떠올랐다. “자넨 눈치가 빨라서 좋아.” 그러곤 주변을 쓱 보며 하는 말. “눈치 챙겨라. 눈치 없으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이냐.” 그 후론 눈치가 빠르다는 말이 어딘지 껄끄러워졌다. 실은 부끄러웠던 것 같다. 눈치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행위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애초에 타인의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는 건 자신을 지킬 무장을 스스로 벗는 것과 다름없다.

<인사이드 아웃2>를 보고 내가 너무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싶어 울쩍해졌다. 이미 자라버린 어른으로서 굳이 갖춰야 한다면 이제 눈치 대신 염치를 장착하고 싶다. 눈치의 근거가 타인에게 있는 반면 염치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힘이다. 중요한 건 부끄러움의 기준을 본인 안에 마련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 것인가. 삶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할 단순 명쾌한 질문. 요즘엔 감히 ‘능력’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귀한 재능. 익숙한 권태에 속아 어린 시절의 기쁨을 되돌릴 수 없다면 적어도 눈치 빠른 사람보단 염치를 아는 어른이 되어야겠다, 고 <인사이드 아웃2>를 보며 새삼 다짐했다. 어느새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시간이 점점 재미있어진다. 무척 오랜만에, 지루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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