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정지돈의 구름과 멀티태스킹하기] 검색의 저주
정지돈 2024-06-27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법에 대한 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지 뭐라도 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은 책이니까 그 정도는 봐주고 넘어가자. 책의 제2장 “단순한 세계의 유령들”은 디지털 디톡스 휴가에서 시작해, 사회를 떠나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세운 사람들의 역사를 되짚는다.

제일 먼저 나오는 건 에피쿠로스학파다. 쾌락주의라는 말 때문에 오해받곤 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사실 쾌락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절제와 평온을 중시하는 철학이다. 그들은 아테네 변두리에 세운 정원 학교에서 자급자족하며 소박하게 살았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닌데 새삼 다시 호기심이 갔다. 특히 그들이 공동체를 정원이라고 불렀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어디 한번 검색해볼까… 에피쿠로스 정원으로 검색하니 수많은 결과가 떴다. 오랜만에 이름을 듣는 아나톨 프랑스의 산문집 <에피쿠로스의 정원>도 나오고(장바구니에 담아둠), 양재천의 카페도 나왔다. 그러던 중 눈에 띈 건 청나라 초기의 산문가 이어가 쓴 <한정우기>였다.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쾌락의 정원>. 출판사는 이어를 동양의 에피쿠로스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검색에 걸린 거였다. 홍보 문구가 이래서 중요한 거군. <한정우기>는 희곡 이론집이지만 실제 내용은 사물에 대한 지식과 생활의 지혜를 담은 양생서라고 할 수 있다. 양생(養生)은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심신단련 행위를 뜻한다.

흥미진진했지만 가격이 다소 비쌌다. 그래, 한문도 못 읽는데 청나라 학자의 책을 살게 뭐람, 나는 물러섰지만 조금 아쉬워 검색 결과를 더 훑었다. 그러다 어느 리뷰에서 <한정우기> 6부에 실린 “술 마시기”에 대한 구절을 발견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손님은 좋아한다. 음식은 좋아하지 않지만 담소는 좋아한다. 밤을 새는 환락을 좋아하지 않지만 밝은 달과 함께 차마 이별하지 못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혹한 주령은 좋아하지 않지만 벌을 받는 사람이 변명하려다가 말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술주정을 부리며 좌중을 욕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지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좋아한다.”

뭐랄까, 이 구절을 읽고 이건 나잖아, 라고 생각했다고 해두자. 이건 사야겠어. 근데 한권만 사기는 좀 그러니까 한권 더 살까. 중국 학자라서 그런지 최근 눈여겨본 소설가 찬쉐가 떠올랐다. 찬쉐… 검색… 찾아보니 찬쉐를 비롯한 중국 선봉파의 작품을 모아놓은 소설집이 있었다. 선봉파는 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들로 우연과 무의미를 강조하고 소설과 역사의 권위를 해체하는 작업을 한단다. 1980년대 후반에 출현해서 중국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주문 완료!

그사이에 벌써 몇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 얼른 제니 오델 책을 읽어야 되는데! 나는 서둘러 다시 책을 펼쳤다. 반문화 공동체를 형성한 미국 코뮌들의 역사가 이어졌다. 1965년과 1970년 사이 미국 전역에 1천개 이상의 코뮌 공동체가 생겼다. 초기에 어떤 사람들은 폴 굿맨의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에 영감을 받았다. 아나키스트 작가인 폴 굿맨은 개별화된 공동체의 분산형 네트워크로 자본주의의 구조를 대체할 것을 주장했단다.

폴 굿맨 익숙한데?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보니 폴 굿맨의 책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가 있었다. 오오 이것도? 하지만 이미 책을 주문하고 난 뒤라 잠시 멈추고 구글에 폴 굿맨을 검색했다. 많은 정보가 떴는데 그중 폴 굿맨의 문체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폴 굿맨은 당대의 지식인이었지만 허술하고 난삽한 문체로 악명 높았다. 특히 조지 오웰이 에세이 <정치와 영어>에서 굿맨의 문체를 비판한 게 유명했다.

정치와 영어? 국내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책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에세이 아닌가? 나는 집에 있는 책을 펼쳐보았다. 있었다. 줄을 친 부분도 있는 걸 보니 읽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읽었다. <정치와 영어>는 조지 오웰이 5편의 산문을 직접 인용하며 당대의 글쓰기를 비판하는 에세이다. “오늘날의 산문은 전체적으로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향을 보인다.” “예 5)는 단어들과 의미가 거의 작별을 한 경우다.” 폴 굿맨의 산문에 대해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한다.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내친 김에 <정치와 영어>에 대해서 더 찾아봤다. 영미권에서는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릴 정도로 전설적인 에세이란다. 다만 비판도 만만치 않다. 조지 오웰은 이 글에서 수동태를 쓰는 것은 옳지 않은 글쓰기라고 했지만, 본인이 평균보다 많은 양의 수동태를 이 글에서 남발했다. 흠, 그렇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나는 다시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버린 뒤였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났지만, 정작 책은 30페이지가량밖에 못 읽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읽은 느낌이 드는 걸까. 지금 내가 습득한 정보가 진짜 유의미한 정보, 지식이 될 수 있을까? 나야말로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것 아닐까.

꽤나 자주 자료 수집은 어떻게 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지식조합형 작가라는 악명 때문에 받는 질문일 텐데, 그때마다 제대로 답을 못했다. 마땅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에세이가 수행적 답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정보는 막상 필요할 때 찾으면 찾기 어렵다. 필요가 아니라, 일상의 흐름에 따라 읽고 듣고 쓰다보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야기가 쌓인다. 아즈마 히로키는 인터넷의 세계에서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건 인터넷을 떠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검색어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고리즘에 갇히지 않으려면 세계 곳곳에서 날아드는 단어들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 때문에 검색의 저주에 빠져 허우적댈지 모르지만, 살아서만 나온다면 남다른 생존 기술을 획득할지도 모른다. 살아서만 나온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