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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전기 바깥의 전기, <차이콥스키의 아내>
이보라 2024-06-19

이따금 도시의 발생 이전에 살았던 이들이 경험했을 소리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기계의 소음보다 자연의 음향이 친숙했을 세계. 거리를 거닐면 물론 그때도 사람들은 떠들고 장난치고 싸웠겠지만, 철도가 발명되고 공장이 세워지면서 도시가 갖게 된 음역과는 차원이 달랐을 터다. 이 추측은 활자와 사진을 통해 짐작할 따름이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대자연이라는 원형으로 섣불리 감응하고 낭만화한다는 한계가 있겠다. 그럼에도 “귀가 먹먹해지는 시대”(데이비드 헨디)의 도입에서, 세상에 없던 것의 소리가 불현듯 우리를 침범하던 순간 인류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에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는 당연히 증기기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다. 영화의 시원적 피사체라 부를 만한 열차는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반복되어온 이미지다. 우리는 열차의 거친 운동, 위아래로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액션’(action)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칙칙폭폭, 덜컹덜컹, 이 격렬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소리의 매혹(혹은 불쾌감)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열차의 조건들은 그것의 여러 제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용한 시각적 운동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재현되는 반면, 청각적 감각은 후퇴하는 방향으로 묘사되곤 한다. 일단 시끄럽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를 하기에 이곳은 나쁜 공간이다. 거창한 논의를 위해 던진 질문은 아니다. 아무리 봐도 소박한 영화인 <차이콥스키의 아내>를 보며 새삼 떠올린 궁금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시작으로 이어가자면, <차이콥스키의 아내>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소리의 문제가 드러날 때다. 즉, 간섭의 문제.

음악 없는 소리의 영화

달리 말해 열차는 대화가 오가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대화가 끼어드는 장소다. 우릉대는 열차에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상태란 로맨스의 주요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아내>에서는 대화기 차단되는 기제로 사용된다. 그토록 열망하던 표트르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의 아내가 된 안토니나 밀류코바(일리오나 미하일로바)는 결혼식을 올린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에 탑승한다. 비좁은 복도에서 대화 중인 둘, 그러나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다. 애초에 일방적인 구애에서 시작한 관계인 데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성별과 지위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는 불균형하다. 마침 표트르가 우연히 오랜 친구들과 마주치고 둘 사이에 타인들이 비집고 들어선다. 대화는 침범당한다. 이 범상한 장면은 열차 안을 메우는, 말의 충돌, 소리의 간섭을 드러낸다.

그리고 멜로드라마의 속성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사랑은 너무 조용하거나 너무 시끄럽다. 그 사이는 거의 없다. 멜로드라마의 자장 안에서 두명의 감독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속삭이는 영화를 만든다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간섭받는 영화를 만든다고 대별할 수 있겠다. 페촐트의 영화에서 연인들은 병실에서, 호텔에서, 다른 이들이 여기 없음에도 무언가 새어나갈까 조용히 떠든다. 심지어 물속에서 무언(無言)으로 대화한다. 그가 다루는 감시사회의 면모가 불안한 연인의 상황에 접속할 때 고요는 외부 세계가 압박해오는 침묵이다. 동시에 이 불우한 조건을 체념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동결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속삭여야 한다, 아니라면 들키고 말 테니까. (물론 여기에는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운디네>에서 소리의 ‘환상적’ 교란에 관해서.)

그런데 <레토>부터 <차이콥스키의 아내>까지 세레브렌니코프는 화면상 흑백 혹은 암흑으로 일관하면서, 사운드에 있어서는 노래든 스코어든 대사든 소리가 느슨하게 중첩되도록, 음향이 은밀하게 우글거리도록 한다. 열렬히 기도하는 안토니나에게 어느 노숙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와 그녀를 방해한다. 또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 가장 강렬하게 사용되는) ‘10월’(《사계》)은 계류음으로 들어찬 곡에서 박자를 더욱 늘어뜨려 기이한 잔향을 지속시킨다. 부부가 사진을 찍을 때 어디서 온지 모를 날벌레의 거슬리는 존재감을 아슬아슬한 사운드로 고조시킬 때는 어떤가. 둘 사이에 끼어든 (그러나 너무 희미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걸 감지하는 것은 표트르뿐이고 그리하여 그는 사진을 찍을 때조차 소리에 홀려 시선을 돌리니까.

여자, 아내, 미망인, 서술자

한편 부부 사이에 타인들이 끼어드는 이 이야기의 다른 면을 보자. 표트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에 안토니나가 외삽된 현상이다. 그에게 결혼은 전략적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전기 바깥의 전기다. 영화는 역사적 기술을 따르는 대신, 전기의 모호한 위상에 기대 전기적 인물 근처에 있던 이에게로 다가선다(동시에 ‘전기적’ 인물의 조건을 질문한다). 이때 이야기의 중심은 보편적인 음악(인)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도리어 신파쪽으로 향한다. 애정 없는 결혼이라는 파국을 견디는 아내에 관한 이야기.

그 점에서 도입부는 남편의 죽음이다. 표트르의 부고를 듣고 그의 집을 찾은 안토니나는 수많은 조문객으로 인해 길을 터기가 어렵다. 보다 못한 변호사가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친다. “미망인 지나가십니다.” 이 말이 여러 번 반복되자 사람들이 속속 비킨다. 평생 주변에서는 물론이고 남편에게조차 그의 아내로 ‘인정’받은 적 없던 안토니나는 그가 죽어서야, 미망인으로, 즉 차이콥스키의 아내로 명명된다. 실상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 일반적으로 차이콥스키는 알지만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알지 못한다. 영화를 다 본 후에도 나는 안토니나에 대해 거의 알 수 없었다. 영화는 안토니나를 납득 가능한 인물로 성립시키는 과정에 실패하는 한편, 시종 어둠과 연기 등의 요소들을 통해 그녀를 구체적이기보다 돌연한 인물로 만듦으로써 이 그르친 여정의 당위를 얼마간 마련한다. 말하자면 그녀를 끝내 완전한 혼자로 도착시키면서 역설적으로 아내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것, 동시에 어떤 여자로서 (전락이 아니라) 비약시키는 것.

마지막으로 부부의 사진 촬영 장면을 떠올려본다. 스튜디오에서의 ‘공식적인’ 사진 촬영을 위해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잠깐 숨을 멈추는 일이다. 시선을 고정하고, 호흡을 정지하는 것. 혼인이라는 사건을 박제하기 위해 아주 잠시 죽는 일. 그리고 여기서 부부는 약속처럼 손을 드러내야 한다. 부부의 징표인 반지가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는 손에 책을 들고, 안토니나는 장갑을 벗는다. 남성의 손에 지식을 상징하는 사물이 들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반대로 여성에게는 모종의 탈의가 요구된다(베일과 장갑, 반지 등 그녀의 몸에는 탈부착 가능한 사물들이 덧씌워진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이후 그 반지를 잃는다. 그녀는 그 유실에 오읍하지만 마침내 징표가 없는 대신 칭호를(물론 칭호 ‘만’) 얻었다. 남편의 비명(碑銘)을 어떻게 새길지 고민하는 서술자의 권력을 쥐고서. 영화의 첫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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