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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대학살 이후 79년, 영화의 역사는 홀로코스트 재현 가능성과 그 방식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고민하고 진화하며 더욱 풍부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고통과 재난을 다루는 영화 형식에 중요한 분기점을 가져온 작품들이 있다. 이들의 궤적을 토대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살펴보았다.
밤과 안개 1955
초기 홀로코스트 영화는 기록 영상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독일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결 10년 후, 강제이송과 강제수용소를 다룬 32분짜리 단편다큐멘터리 <밤과 안개>(감독 알랭 레네)는 이전까지 개인의 고통을 발화하고 집단적 기억으로 소환하기 어려웠던 홀로코스트를 예술의 위치에서 다룬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일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 이후, 홀로코스트의 미학적 재현 가능성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다. <밤과
[특집] 집단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 <밤과 안개>에서 <사울의 아들>까지, 홀로코스트 영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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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우리 시야에 드물게 잡혔던 현대영화의 이상을 이뤄냈다. 신화적 스토리텔링의 기대 지평과는 담쌓고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아이러니 모드의 화술로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경이적으로 접합해 비극의 다면도를 보여주는 재능이다.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는 아우슈비츠수용소 옆 관사에 살았던 독일군 장교 가족의 일상 루틴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가운데 고소한 빵 맛을 음미하며 세계의 비극을 잊는다는 우리 시대의 무도함을 상기시킨다. 이 영화에 본다는 것의 기쁨은 없다. 첫 장면을 블랙아웃으로 길게 처리한 것은 그런 기쁨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도발적인 선언이며 동시에 깔리는 불길한 음악은 공포영화에 맞먹는 전율의 화면들이 이어질 것을 암시하는데 회스 소령 가족의 단란한 강가 피크닉으로 이어지는 후속 장면에서도 그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다는 것의 기쁨 대신에 영화 내내 관객의 시각과 청각 신경을 자극하는 이 긴장의 밀도는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파국은
[비평]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충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이룬 현대영화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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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예술과 연민으로 오늘을 가로지르기
조너선 글레이저는 해나 아렌트의 철학을 빌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나치 사령관 가정의 진부함을 바라본다. 악에 부역한 개인의 평범함이란 주제에 따르는 위험한 연상은, 인물이 지닌 허점과 무지를 묘사함으로써 자칫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과작의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는 10년 동안 형식미학뿐 아니라 폭력을 재현하는 관점 또한 통렬하게 벼렸다. 직업적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남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꿈에 그리던 집을 막 소유한 여자 헤트비히 회스(잔드라 휠러)에게 ‘관심 구역’은 평화의 장소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따금씩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속삭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강박적 회피, 무심함을 가장한 불안, 밤새 비명과 열기로 아우성치는 소각장 내부를 상상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가리킨다. 평범한 악이 얼마나 추레한 것인지를, 글레이저의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성취 - 화창한 꿈의 집 위로 우리가 감각하는 어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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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쨍한 화면으로 음울한 자각과 성찰을 동반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사령관 가족이 마련한 꿈의 집에서 시작된다. 박제된 듯한 목가적 일상이 전시되는 동안, 영화의 진실은 철조망 너머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와 비명을 통해 전달된다. 6월5일 개봉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줄곧 그로테스크한 감각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렸던 조너선 글레이저가 역사의 표층을 자신만의 언어로 파헤친 충격적 시도라 할 만하다. 글레이저의 영화가 국내 개봉한 것은 <언더 더 스킨>(2014) 이후 무려 10년 만. <섹시 비스트>(2000), <탄생>(2004), <언더 더 스킨> 이후 네 번째 장편을 내놓은 과작의 감독 글레이저에게 기다림은 곧 영화 전반을 압도하는 장악력을 축적하는 시간에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선사한 충격파를 시작으로 일찌감치 근자의 문제작으로 떠오른 <존 오브 인터
[특집] 영화를 듣고 본다는 일의 의미, 올해의 마스터피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읽는 다양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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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간 작업해오던 영화를 마침내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 매일 생각이 달라진다. (웃음) <원더랜드>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건 2016년 정도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완성하기까지 2~3년, 작품 준비하는 데 2~3년이 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과 맞물려 촬영 및 후반작업이 엄청 길어졌다. 한달 동안 새롭게 편집해도 다시 보면 예전 버전이 나은 것 같고, 발전이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뒤로 가고, 일부분은 포기하기도 하는 과정이 동반됐다. 개봉 전주까지 계속 음악을 바꾸고 사운드를 믹싱했기 때문에 영화가 공개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기쁘다. 한편으로 나는 이 이야기가 재밌는데, 과연 다른 사람도 재밌어할까라는 걱정이 이번 작품에서 가장 크게 들었다.
-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걱정이 되나.
= 나로서도 질문이 많은 영화였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뭘까, 그리워하는 상대를 만나는 게 정말 좋을까, 어떤
[인터뷰] 알기 위해 믿는 것일까, 믿기 위해 아는 것일까, <원더랜드> 김태용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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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라도. ‘원더랜드’ 서비스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음에 준하는 상태에 놓인 환자들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해준다. 해당 서비스가 보편화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의식을 잃기 전 원더랜드로 넘어가거나 원더랜드를 통해 보고 싶은 이를 만난다. 죽음으로 인한 단절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원더랜드의 이점이지만, 그것이 축복과 굴레 중 무엇으로 귀결될지는 사용자 개인의 시선에 달려 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만추> 등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오랜 공백을 깨고 신작 <원더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 등을 기용하며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주목도가 높았던 작품이다. 다수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들의 관계성과 감정선을 다루는 건 <가족의 탄생>에서 김태용 감독이 이미 시도한 구성이다. 이번 작품에서
[기획] 그리움을 연결하시겠습니까?, <원더랜드>의 인공지능이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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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내일로>는 감독의 이름을 모르고 감상해도 난니 모레티의 신작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 풍경부터 죽음, 상실 같은 묵직한 소재를 과감하게 포획하면서도, 시네마에 대한 발랄한 애정을 놓지 않았던 모레티의 인장이 뚜렷하다. 영화에서 주인공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힘겨운 제작 환경과 쉽지 않은 인간관계에 분투하면서 영화를 계속 찍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찬란한 내일로>는 희망 어린 시선으로 그리는 메타 시네마다. “‘이제 막 시작된’ 커리어의 이정표를 찍고 싶었다”는 난니 모레티를 화상으로 만났다.
- <찬란한 내일로>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 관한 영화다. 이런 형식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 몇해 전에 195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각본을 쓴 적이 있다. 한동안 준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중단하고 <일층 이층 삼층>(2021) 촬영에 돌입했다. 그런데 <일층 이층 삼
[인터뷰] 여러 소재와 시간, 차원이 공존하는 영화, <찬란한 내일로> 감독 난니 모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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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이를 영화를 만들어본 적 없는 관객도 수많은 ‘영화 만들기 영화’를 통해 학습해왔다. <찬란한 내일로> 속 영화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가 5년 만에 만드는 제목 미상의 신작 영화는 프로덕션 내내 난항‘만’ 겪는다. 처음 함께한 제작자 피에르(마티외 아말릭)는 가끔 현장에서 이상행동을 하고 주연배우 베라(바르보라 보뷸로바)는 대부분 감독과 상충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생 조반니의 영화를 제작한 아내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조반니에게 별거를 선언하고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부모보다도 연상인 폴란드 대사 예지(예지 스투흐르)와 열애 중이다.
바람과 대척을 이루는 현실 앞에서
관객은 조반니의 신작을 두고 찬란한 내일을 낙관하기 어렵다.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결말을 비관하게 된다. 희망을 놓지 않고 영화제작의 투지를 불사르는 작중 캐릭터는 조반니가 유일하다. 감
[기획] 과거에 서서 영화의 미래까지 사랑하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픽션 페르소나는 어떤 변화를 관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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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시네마의 거장 난니 모레티가 국내 개봉작으로는 9년 만에 신작 <찬란한 내일로>로 돌아왔다. <찬란한 내일로>는 난니 모레티가 또 한번 감독 본인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와 만든 영화다. <나의 즐거운 일기>(1994)부터 시작된 그의 픽션 페르소나 조반니가 어김없이 영화에 등장하고, 5년 만에 현장에 출근한 조반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개념에 상대가 뜻을 같이하길 바라며 누굴 만나든 ‘영화란 무엇인가’를 설교한다. 그리하여 <찬란한 내일로>는 모레티가 21세기에 만든 그 어떤 작품보다 미우나 고우나 영화를 향해 경애를 한껏 바치는 작품이 된다. 산전수전 속에 영화를 만들었고 또 만드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시네마의 화창한 앞날을 바라는 난니 모레티의 신작을 돌아보았다. 난니 모레티와 나눈 인터뷰는 영화를 사랑하는 길로 향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에
[기획] 미우나 고우나, 영화를 만든다 - <찬란한 내일로> 리뷰와 난니 모레티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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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는 스크린에 물리적으로 구현 가능한 시청각적 쾌감, 그 지평선 너머를 향해 질주해온 시리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 신작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보여주는 것’만큼 ‘들려주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 ‘매드맥스 사가’라는 부제답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역사가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닫는 형식은 마치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퓨리오사’라는 전설을 설화로 풀어낸다. 바로 이 점이 <퓨리오사>의 빼어난 성취이자 동시에 아쉬운 점이다. <퓨리오사>는 (예상 밖으로) 서사적인 완성도가 탁월해진 반면 (기대보다) 직관적인 쾌감은 옅어졌다. 한마디로 전작들과 달리 도파민이 무작정 분출되진 않는다.
광기에서 이성으로
어쩌면 이 아쉬움이야말로 조지 밀러의 명확한 의도로 보인다. 영화 말미 복수의 천사로
[비평] 지옥에도 도파민이 필요하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있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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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리퀄인가
프리퀄은 불리한 게임이다. 권리금을 지불하지 않고 전작의 인지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행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창작자 입장에선 기본적으로 시퀄보다 따르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본편’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말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라는 역사적 걸작이 결말인 영화다. 다시 말해 <퓨리오사>가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들의 결과물, 예컨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고 누가 어디를 얼마큼 다치는지에 관한 상세 정보를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승패 결과와 스코어를 알고 보는 스포츠 경기만큼 김빠지는 게 없는 것처럼, 어차피 우승자가 정해진 <퓨리오사>라는 카 체이싱 경주를 <분노의 도로>만큼 박진감 넘치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렵
[비평] 위대한 역사가의 일 - 결말을 아는 프리퀄에 주인공을 ‘다시’ 세우는 이유